“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더 슬픈 이야기들”
문학평론가, 한국문학 연구자, 대학 시간강사, 심지어 번역가, 느닷없이 에세이스트
그리고 ‘쓰는 사람’ 서영인의 첫 산문집
“우리 첫 잔은 아사히生으로 마실까?” 서영인 작가를 만날 때면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작가는 그때도 망원에 있었고 지금도 망원에 있다. 사실 망원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겠다. 울산, 도쿄, 뉴욕, 혹은 또 다른 어디든. 작가 곁에는 늘 가난이 있을 것이고 가난을 후려치는 유머가 있을 것이며 마르지 않는 맥주와 멈추지 않는 문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더 슬픈 이야기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처럼. _박준(시인)
‘말끔하고 쨍한 얼굴로’ 오늘 하루도 장하게 산 우리 모두를 위한
다정하고 맛있는 망원동 이야기
문학평론가이자 한국문학 연구자인 서영인의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2000년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후 4권의 평론집과 연구서, 2권의 번역서를 펴냈으니 쉼없이 읽고 써 왔다.
산문집을 구상하게 된 배경과 집필 과정이 에필로그에 상세히 쓰여 있는데 저자는 처음에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은 뭔가 공익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지나치게 바른생활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지라” 망설였다. 왜 아니겠는가. 문학 연구자로 대학강사로, 비평하고 가르치는 일로 먹고살다 느닷없이 ‘내’가 온전히 드러날 게 뻔한 에세이를 그것도 전작으로 써야 한다니 우선은 낯부터 설밖에. 그러나 중앙일간지에 꾸준히 연재해 온 칼럼들을 통해 그가 보여 준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롭지만 따듯한 시선, 특유의 위트와 유머가 지면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나니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살아난다. 어느 순간 핫플레이스가 되어 버린 망원동 골목골목을 누비며 혼자서도 잘 놀고 잘 마시는 독거 중년의 삶을 재미있게, 말하자면 ‘또 다른 서영인’의 시선으로 담아 보자는 애초의 기획 의도는 작가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매우 지적이면서 자기성찰적인 동시에 다정한 누군가와 팔짱끼고 낄낄거리며 망원동 어디쯤의 골목을 헤매고 있는 듯한 유쾌함으로 구현되었다.
맥주와 마라톤을 좋아하고 앞으로도 평생 읽고 쓰며 살아갈 작가의 글은 시인 박준의 말대로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더 슬픈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망원동의 골목을 누비며 부동산과 세탁소와 목욕탕과 편의점을 점찍고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파는 노점, 맛있는 맥줏집과 식당, 카페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이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기어이 장하게 견딘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응원이 되어 줄 것이다.
‘누가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그랬니?’
임시거주자의 좌충우돌 도시생활 탐구기
저자는 망원역 근처에서 5년째 살고 있다. 1장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때로 거슬러올라가 전세계약을 연장하며 살고 있는 지금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방이다 싶은 것이 방처럼 있고, 주방이다 싶은 것이 주방처럼 있으면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빌라가 많은 동네 부동산들의 직업적 고충도 이해하게 되었다. 원하는 집의 조건을 구구절절 들어본들 무엇하겠는가, 저 아무 방 대잔치의 향연을 보며 괜히 마음만 아플 것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구해 준 부동산 아저씨에게 나는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런저런 조건을 야무지게 늘어놓는 고객의 말을 듣다가 그럼 한번 가 봅시다 하고 묵묵히 길을 나섰을 심정이 지금 생각해도 애잔하다.
_「세상에는 별별 집이 다 있다」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을 찾아간 저자는 <기치조지만이 살고 싶은 거리입니까>라는 만화 원작의 일본 드라마를 떠올리며 얻을 집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조건을 시시콜콜 부동산중개인에게 말한다. 작가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찾기 전까지 돌아본 집들의 면면을 묘사한 부분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세들 집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이야기이다.
집을 구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아야 한다. 시장은 어디에 있는지, 어느 집의 채소와 과일이 더 싱싱한지부터 어느 목욕탕의 세신사가 더 정교하게 내 몸의 때를 벗겨내 줄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솜씨 좋은 설비집은 어디인지까지 우리가 그간 대수롭지 않게 해 온 일들이 작가의 글을 통해 새삼 떠올라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채식과 육식에 대한 단상에서 기본소득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담아 내고 있는 삶의 면면을 낄낄거리며 따라가다 보면 일상의 위대함은 결국 소심하지만 까다롭게 주변을 살피는 평범으로 이룩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맛있는 걸 먹고 있으면 다정해진다
‘이상한 나라의 토끼처럼’ 기웃기웃 어슬렁, 거닐어 보는 망원동의 골목 산책
집도 구했고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동네 정보 파악까지 마쳤으니 이제 먹고 마시고 즐길 만한 아지트들의 목록을 만들차례다. 작가는 알 만한 사람은 아는 맥주애호가이며 ‘발 달린 동물’에서 나온 고기는 먹지 않는 준채식주의자이다. 2장은 이런 작가가 찾아 낸 망원동의 밥집과 카페, 맥줏집에 대한 매우 ‘편파적이며 주관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확실히 경리단길이든 망리단길이든 젠트리피케이션의 결과물이자, 또한 잠재적 희생물이다. 이미 그 희생과 파열은 시작되고 있다. 시민운동이나 도시 정책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또 그와 관련한 실천이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릴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는 일 말고는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처지이지만 괜히 픽업하듯 이곳저곳 지명하는 것을 정보 제공이라 생각하는 무신경함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뜨는 동네든 가라앉는 동네든 동네가 동네로 존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자주 제대로 불러주는 일은 생각보다 꽤 중요하다.
_「망리단길 불만」
홍대와 합정의 잘나가던 집들이 젠트리피케이션을 못 견디고 연남동과 상수동에서 망원동으로까지 밀려나면서, 젊은 층들의 데이트 장소로 급부상한 망원역 인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다. 최근에는 이 망원역 인근마저 세가 오를 대로 올라 6호선 라인인 증산역과 새절역 근처로 옮겨 가는 집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와중이니 에필로그의 제목처럼 오늘 만난 커피집 청년이 문득 사라지는 일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망원역 인근의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이 집 저 집의 간판에 눈을 맞춘다.
주인장이 나의 식사를 걱정해 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냥 고맙다. 짠 것만 먹어 입이 쓰지 않을까. 꼭꼭 씹어야 되는 반찬이 있으면 부드럽게 홀홀 넘어가는 반찬도 있어야 하고. 고소한 맛을 생각해서 참기름을 쓰고 새콤하게 입맛을 돋우는 초무침도 있어야 하고. 이런 걸 생각하면서 그날의 백반메뉴를 구상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으면 어쩐지 식당을 전전하며 밥을 먹고 있는 내 신세도 꽤 뿌듯해지는 것이다.
_「백반집을 찾아서」
늘 주장하는 말이지만 예쁜 것들, 맛있는 것들은 까다롭다. 조금씩 비위를 맞춰 가며 담아내고 맛보고 즐겨야 한다. 싸고 맛있고 푸짐한 것은 없다. 조금 아쉽고 부족하더라도 맛있는 것들은 조금씩 자주 맛보아야 한다. 한 젓가락에 후루룩 촙촙 먹고 국물을 다 마실 때까지 예쁜 여운을 남기려면 이 집의 냉소바 양은 절반으로 줄어야 한다.
_「영혼을 데워주는 카페 덮밥」
지인들을 몰고 가게를 찾을 때마다 요리를 시켜 맛을 보게 하고 맛있다는 감탄을 세 번 복창으로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애틋한 마음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테이블마다 손님이 가득 차 있기만 바라고 있다. 그래야 맛있는 맥주는 더 맛있어질 테고, 화덕 앞에서 땀을 흘리는 사장님도 좀 더 신나게 요리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임대료는 자꾸 치솟고 자본력 넉넉해서 광고도 잘하는 음식점이 매일 생기고 있는 망원동에서 좋은 재료와 까다로운 맛의 기본을 포기하지 않는 집이 더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더 부지런히 먹고 마셔야 하려나.
_「생선천국, 오븐지옥」
“할 일이 많을 때 소설이나 드라마로 도피하는 성향이 있으며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맥주맛에 민감”하다고, 몇 년 전 번역한 책(『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의 역자소개에도 밝히고 있듯, 작가는 소문난 미식가이자 맥주성애자이다. 그래서인지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철학과 묘사가 얼마나 절묘하고도 적절한지 작가가 일러주는 소바집과 중국집, 백반집과 맥줏집 들에, 한번 가본 적 없이도 애틋하고 다정한 마음이 들어 괜히 식당 이름이라도 한번 읊조려 보게 한다. 그리고 오늘도 ‘다정함과 무심함 사이’에서 ‘나름대로 자기만의 생활과 비밀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재미있을 거라고 호의적으로 상상하고 내색하지는 않으면서’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과 스쳐가는 뒷모습,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가게들이 있는 골목을 상상하거나 추억하게 만든다.